달의 단면

습작

현수는 엄마 영은을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지하철까지 고려하면 벌써 세 번째 환승이었다. 그러나 현수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반짝이는 눈으로 차창 밖을 감상하기 바빴다. 쏜살같이 방향을 역행하며 사라지는 풍경과 휴일 거리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활력 같은 것들. 현수를 황홀하게 하는 것은 그러한 생동이었다. 반면, 영은의 초점이 불분명한 눈동자는 버스의 움직임을...

be 동사, 非凍死

29.5° 한파가 스몄다고 길거리에 휴대폰 화면을 보며 걷는 사람들이 적어졌다. 조금만 노출되어도 발갛게 어는 손들은 제 집이라도 찾아 들어가듯 각자의 외투 주머니 속에 안주해 있었다. 늘상 시선을 고정하던 물체 또한 주머니로 자취를 감추니, 앞만 보며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말의 공허함과 뜻밖의 상실감에 멀건한 눈을 했다. 나는 그 곰탕같이 ...

삑, 하는 가벼운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6번 선수가 긴장하는 기색 없이 도약대로 걸어가 몇 번 가볍게 뛰어 올랐다. 힘찬 발돋움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오른 선수는 곧 유려한 동작을 선보이며 물속으로 낙하했다. 구멍에라도 쏙 찾아 들어간 것처럼 안정적인 물보라가 일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기계음이 높은 숫자의 점수를 읽었다. 이전 1위였던 점수를 6...

경고. 여기는 2100년 지구입니다. 이 활자를 읽는 사람이 현재보다 과거의 사람이라면, 부디 이 행성을 떠나시길 바랍니다. “종말론이 또 돈대.” 너 들었어? 은성이 고개를 들리며 묻는다. 손에는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컵이 들려있다. 시선의 끝에 기담이 닿았다. 기담은 눈이 내리는 창가 앞에 서 있는 은성을 한 번 흘끗 바라보고는 다시 원래 두던 곳에...

네가 울면 무지개 언덕에 비가 온단다

이도완네 엄마가 죽었다. 오늘내일 하면서 누워 있는 게 거진 1년 다 됐었는데, 올해 더운 장마의 짓무르는 계절감을 이기지 못 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걔네 엄마가 방에서 반죽음 상태로 목숨을 연명해야했던 이유는, 이도완 말로는 엄마가 시한부기 때문에 병원에 있는 의미가 없어 본인이 집에서 보살피기로 해서라지만 내가 볼 땐 그냥 병원비가 없어서다. 그건 이도...

서울시 양보구 배려동 1004번지에서 유덕분은 태어났다. 덕 덕德 자에 나눌 분分 자를 쓴 그 단어 그대로의 이름이다. 특히 저 덕 자로 말할 것 같으면 행복의 덕으로만 통용되는 게 아니라, 선행•절조•베풂•도덕을 아우르는 꽤나 끔찍한 단어였다. 공정하고 도덕적인 마음을 품을 것, 의무적 선 행위를 일삼을 것이 내재된 덕분이라는 이름은 자칫 당사자에게 유복...

교실 안으로 나부끼는 더운 바람이 제법 나른하여 금방이라도 선잠 들고 싶은 시간이었다. 점심시간 직후에 듣는 강의식 사회 수업은 나이 지긋한 선생의 입에서 문장으로 잉태될 때마다 잠들게 하는 주문이 되어 귓가에 고였다. 아이들 태반이 고개를 가누지 못 하고 꾸벅거리면서도 필기구를 놓지 못 한 채 눈을 감았다 뜨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졸면서 글을 적다 ...

제 1막. 청아. 나 죽고 싶다. 소년은 눈을 끔뻑인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간다. 죽고 싶다는 생각 진짜 별거 아닌 거 같아. 옛날엔 누군가 죽고 싶다고 말하면 엄청난 우울과 불행이 치밀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위로와 희망이 있어야지만 이겨낼 수 있는 거라고도 생각했어. 하지만 나는 그냥 ...

꽃 질식 반지하 단칸방에서는 늘 가난의 냄새가 났다. 쓸고 닦고 환기해도 없앨 수 없는 곳에 도사리는 가난. 사람의 후각은 환경에 쉽게 적응한다고, 그 속에서 팔 개월 째를 살아내고 있는 나는 언젠가 그 냄새마저 품고 살아갔다. 이따금씩 집을 비우고 나서 다시 발을 들일 때는 문을 열자마자 훅하고 호흡기에 냄새가 들어찼지만 그도 잠시였다. 나는 그 가난의 ...

걔는 집밥같은 글이 쓰고 싶다고 그랬다 밋밋한 듯 싶어도 자꾸 생각나고 찾게 되는 영양분 가득한 글을 짓고 싶다고 그러면서 늘 나를 나무랐다 내 글 속엔 알맹이가 없다고 과대포장 된 군것질 마냥 한 번 달고 마는 글을 쓸 거냐고 그랬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단어를 나열해서 줄글 몇 자 적는 게 문학이냐면서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야 그건 네가 껍데기만 핥고...

마지막 인사가 이렇게 줄글뿐일 따름이라 미안합니다. 얼굴을 뵙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가는 길이 너무 서먹할까 싶어 이기적으로 굴었습니다. 마음은 편하지만 이제 막상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군요. 아무렴 당신은 어떻겠습니까. 인간과 똑같은 시스템을 개발하겠다는 당신의 연구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 목적의 달성인 내가 이렇게나 실패작이니까요. ...

아름다운 예술이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자살, 우울, 안면인식장애와 같은 약한 트리거를 동반합니다 사람들은 암울한 창작을 하는 예술가들을 대개 정신이상자로 보는 경우가 많다. 몰랐는데 나에게도 어느 정도 그런 선입견이 있었다. 그 사람의 작품을 보면, 대충 과거에 시련이 있었겠거니, 정신병이 있겠거니 하는 게 눈에 선하다. 이런 창작이 나온 거면 분명 인생의 나락과 실패를 필연적으로 맛봤겠군. ...